정순왕후(조선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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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계비.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주 원씨[1] 의 딸이다.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서 태어났다.[2]# 대비로서의 존호는 '예순대비'(睿順大妃)지만, 이 명칭으로는 잘 불리지 않는다. 시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소숙정헌정순왕후 김씨'(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王后金氏)로, 왕비로서의 정식 명칭은 이 시호에서 딴 '정순왕후 김씨'다.
정조 사망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는 인식 때문에, 흔히들 안동 김씨로 많이들 착각하는데, 실제로는 경주 김씨다. 소현세자빈 강씨를 신원하려다 장살된 김홍욱[3] 의 직계 후손이며 추사 김정희의 증대고모뻘 되는 인물이다.[4] 그래서 훗날 김정희가 벽파 잔당으로 몰려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5]
2. 생애[편집]
삼간택을 행하여 유학 김한구의 딸을 정하고 대혼을 6월 22일 오시로 잡다
삼간택(三揀擇)을 행하여 유학(幼學)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정하고, 하교하기를,
"김한구의 따님으로 정하였는데 첨의(僉議)는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좌의정 신만(申晩)·우의정 이후(李) 및 예조(禮曹)의 세 당상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성교(聖敎)를 받들으니 진실로 신인(神人)의 소망(所望)에 합당합니다.
이는 실로 온 나라 신민(臣民)의 복이니, 흔변(欣忭)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대혼(大婚)을 6월 22일 오시(午時)로써 택길(擇吉)하고 이날 정사를 열어 김한구를 돈녕 도정(敦寧都正)으로 삼았으니,
왕비(王妃)의 아버지에 대하여 전례(前例)대로 제수한 것이다. 김시찬(金時粲)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안집(安)과 유한소(兪漢蕭)를 분승지(分承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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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5세의 어린 나이로 51세 연상인 66세의 영조와 6월 22일에 창경궁 명정전에서 가례를 치루고 왕비로 정식 책봉되었다. 의붓아들인 사도세자·혜경궁 홍씨(둘다 1735년생)보다도 10살이나 어리며, 정조(1752년 생)의 계조모지만 실제 두 사람의 나이는 겨우 7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할 당시에는 정순왕후의 할아버지인 김선경도 생존해 있었는데, 1699년(숙종 25년)생으로 영조가 5살 더 많았다. 조선의 역대 왕비들 중에 가장 국왕과의 나이 차가 큰 관계이다.
명정전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예를 거행하다
임금이 원류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에 친림하여
비(妃)를 책봉하는 예(禮)를 거행하였는데,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비를 책봉한 뒤에 복명(復命)하였다.
정순왕후와 영조의 가례 절차, 가례식을 다룬 기록이 《영조 정순후 가례도감 의궤》인데 총 2권으로 2011년 외규장각 문서 반환 당시 포함된 의궤기도 하다.
2.1. 임오화변 전후의 정순왕후[편집]
흔히들 정순왕후가 사도세자를 모함해 임오화변이 일어났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절대 아니며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 정순왕후는 궁에 들어온 지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어린 18세 소녀였으며, 사도세자를 모함하긴 커녕 세자와 관계된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아무리 왕의 정실부인인 중전이였다고 하지만 왕손을 낳은것도, 입궁한지 오랜 시간이 흐른것도 아니였기 때문에 가정까지 있는 왕세자를 모함하는것 자체가 폐비감이며, 임오화변 당시에도 영조는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와 상의했지 명색에 중전인 정순왕후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순왕후가 입궐한 그 시점에서 이미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는 정말 파탄난 상태였다.
이론적으로 영조는 당시 정순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볼 수는 있긴 했다. 그러나 영조에게는 이미 장성한 아들과 손자들(정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이미 있었다. 이미 중종과 선조가 왕세자가 있는데 새로 왕비를 뽑고 그 사이에서 또 아들을 낳았다가 사후 을사사화, 계축옥사가 일어난 전례를 생각해보면, 정순왕후 입장에서 영조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낳길 바라는 건 그렇다쳐도[7] 사도세자를 모해해서 얻을 이익 자체가 없었다.[8]
거꾸로 왕비로서 사도세자를 보호, 옹호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당시 정순왕후의 미약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정상참작을 하고도 남을만한 일이다. 왕실 인사 중 그나마 목소리를 낼 만한 인사인 세자빈 홍씨와 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도 상황을 차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는 영조에게 세자를 대처분(죽이라)을 고하며 세손만이라도 살리는데 급급한 판국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순왕후가 아무리 중전이라고 해도 뭘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9] 심지어 왕실의 예민한 부분인 사도세자 관련은 고사하고 영조의 총애를 받던 승은상궁[10] , 즉 후궁으로도 봉해지지 못한 정5품 상궁 나부랭이가 품계를 초월한 중전에게 기어올랐던 기록이 남아있다. 저 승은상궁이 대들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 때가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1년 전(1761년, 영조 37년)쯤인 걸 보면, 당시의 정순왕후는 남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자시고를 떠나 본인 입지를 구축하는데 급급했을 것이라는 쪽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벽파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 묵인한 혐의가 있다고 우기지만 이조차도 말이 안 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사할 때 벽파라는 당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훗날 벽파가 되는 사람들도 전부 사도세자 사사에 별반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벽파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김종수, 심환지의 청명당은 정조의 지지세력이자 외척(특히 풍산 홍씨)의 반대세력이었다.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사도세자는 영조 38년(1762년)에 죽었으나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 가문은 영조 46년(1770년) 무렵이 되어야 발흥했다. 진짜 사도세자의 죽음에 정순왕후가 개입했다면 그 가문이 8년이나 늦게 뜰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홍봉한의 풍산 홍씨 가문은 임오화변의 사도세자 사사 이후 더욱 발판삼아 기세가 등등해졌다. 홍봉한은 임오화변에서 사위인 사도세자를 거의 매몰차게 손절하고, 외손자인 세손의 보호자(후견인)를 자처하는데 앞장선 대표적인 행위자였다.
노론 음모론에 기반한 낭설에서는 정순왕후가 늙은 영조보다는 젊은 사도세자에게 매력을 느껴서 그를 유혹하려다가 거절당한 후에, 앙심을 품었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얘기도 있지만 당연하게도 전혀 근거 없는 헛소리다. 그럴려면 일단 목숨이 날아가고 가문이 풍비박산날 것을 예상해야 할 일인데 미쳤다고 역린을 건드릴 짓을 하겠는가.
2.2. 홍봉한(풍산 홍씨)-김귀주(경주 김씨) 대결[편집]
영조 말기 외척인 풍산 홍씨 가문의 홍봉한(북당)은 최대의 세도가로 치솟았는데,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의 김귀주(남당)는 이를 저지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북당과 남당이라고 한다.
훗날의 시벽파 간 당쟁으로 인해 오해가 많지만,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가 이끄는 남당 세력이 영조 치세 후기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이복 형제인 홍인한 세력, 즉 북당에 맞서서 세손인 정조를 보호하는 입장이었다. 정조의 대리청정을 저지하고 심지어는 암살 기도에 나선 것이 다름 아닌 풍산 홍씨였으며, 결국 정조가 즉위 초에 외조부인 홍봉한을 직접 내쳐 버렸다. 실제로 정순왕후는 정통 사극에서 영조 치세 때 세손 정조에게 우호적으로 나오는 부분이 꽤 있지만,
물론 외견상 당시 세손의 보위 승계를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으며, 탕평당 계열이나 청명당 계열이나 서로 세손의 보호자(후견인)를 자처했다. 즉 세손을 두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척신 위주의 완론 탕평에 대해 곱지 않았던 정조가 청명당 계열과 친하게 지내자 홍인한, 화완옹주 쪽에서 청명당 인사들을 공격하면서 영조 년간 세손과 척을 지게 된 것이다. 대리청정 문제도 원래 대리청정 명령이 내려지면 처음 몇 번은 대궐 뜰앞에 나아가 전교를 거두어달라고 꿇어엎드려서 반대하는 게 맞는데 이때 태도를 문제삼아 청명당 쪽에서 홍인한을 치려했고, 다시 홍인한 쪽에서 서명선의 상소를 가지고 청명당을 공격하면서 남북 양당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었다.
정조는 오히려 즉위 이전엔 정순왕후 및 경주 김씨 일가와 연대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 48년(1772년), 정조가 정순왕후를 찾아가 외조부인 홍봉한이 자신을 위협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여러모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오히려 정조가 외가인 풍산 홍씨보다도 정순왕후를 더 믿었다는 소리가 된다. 최소한, 연합이 가능한 상대로 여기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직후, 남당의 김귀주가 북당의 홍봉한을 공격하는 소를 올리게 된다.
공조 참판 김귀주가 홍봉한의 일로 상소를 올리다
(중략)
"아! 저 홍봉한은 의리를 만환(漫漶, 어지럽혀 번지게 함)하고 성궁(聖躬, 임금의 몸)을 무함(誣陷) 날조함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는데,
신이 만약 우물쭈물 명확하지 못하게 되돌아보며 그의 권세를 두려워해서 한갓 평일의 척가(戚家) 사이의 의리만 보존한다면,
이는 위로 전하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선신(先臣, 자기의 망부, 김귀주의 선친)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황천(皇天)·신명(神明)이 위에서
질정(質正)하고 계시는데, 신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하겠습니까? 이후부터 그의 원망하는 유감이 날로 더욱 심해져 봉적(鋒鏑)의 독맹(毒猛)이 마디마디
겹쳐 가중되므로 전해오는 말이 해괴하고 패악함을 이기지 못해서 듣는 자들이 모두 신을 위태롭다고 여기니, 신은 문을 닫고 자취를 거두어 영원히
세상에 대한 생각을 끊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종사(宗社)가 날로 위망(危亡)해지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막막하게 깨닫지 못하고
흉적(凶賊)은 더욱 방자하게 날뛰는데도 조정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감히 말을 하지 않으니, 분개하고 통분함을 삭이지 못하고 이에 감히 대강을
들어 죽음을 무릅쓰고 말합니다."
하였다.
- 《영조실록》 119권, 영조 48년(1772년, 청 건륭(乾隆) 37년) 7월 21일 (갑인) 2번째기사
영조 승하 직전,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행케 하려고 했을 때 홍인한이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서명선의 직소로 영조가 격분하며 세손은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되었다. 정조가 상소를 올렸는데 올리기 전 정조는 정순왕후를 찾아가서 홍인한이 "내 말 안 들으시면 저하께서 재미 없으실 겁니다."라는 얘기를 했다고 일종의 고자질을 했다. 이 역시 정조가 얼마나 정순왕후를 믿었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 김한구가 홍봉한의 문객[12] 으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홍봉한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새로운 외척의 탄생을 막기 위해 정순왕후가 간택되도록 후원하지 않았느냐는 해석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홍봉한은 뒤통수 제대로 맞은 격. 사전에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홍봉한이 경주 김씨의 인물들을 중용할 것을 건의해도, 정순왕후 본인이 "외척을 중용하는 것은 지나친 행위"라며 직접 반대를 했다. 홍봉한과는 협력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나타낸 동시에 중전으로서 외척 등용을 삼가는 모범을 보임으로서 명분까지 확보했다. 이후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 가문은 계속 홍봉한의 풍산 홍씨 가문과 대립했는데 순조 치세 때에는 홍봉한의 아들인 홍낙임이 사사되기까지 했다.[13]
그럼에도 풍산 홍씨 가문 출신이었던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나이는 어리지만 족보상 시어머니가 되는 정순왕후 김씨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하고 주로 김귀주를 공격했으며, 정순왕후에게 서운함을 드러낼 때도 그녀가 나쁜 게 아니라 이간질하는 세력 때문이라고 돌려 말했다. 《한중록》에는 김귀주 등이 정순왕후가 왕자를 낳도록 명산 대찰을 찾아 굿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중록》의 시점 역시 주목할 만한데, 혜경궁 홍씨가 어린 시어머니인 정순왕후의 죽음을 지켜본 후에 순조에게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사를 전달한 측면이 강하다. 정순왕후는 풍산 홍씨 가문의 원수나 다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혜경궁은 정순왕후를 차마 악인으로 몰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명백하게 친 정조파였던 정순왕후가 어떻게 해서 반 정조파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게 되었을까? 원인은 정조 즉위 직후의 김귀주 숙청에 있었다.
2.3. 정조는 왜 김귀주를 숙청했을까?[편집]
문제의 영조 46년(1770년) 3월, 남당의 김귀주는 유생 한유를 시켜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북당의 홍봉한을 직격했다. 이른바 《망국동 망정승》 상소이다. 이 상소에서 남당의 한유는 홍봉한이 사는 '안국동'을 망국동이라고 부르는 세간의 민심을 거론했으며, 무엇보다 "일물", 즉 뒤주를 직접 들여보내 임오화변에 적극 나선 점을 공격했는데, 바로 이 대목이 영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한유를 체포하여 오니 상소의 내용에 대해 신문하다
금오랑(金吾郞, 죄인을 잡아오는 의금부도사)이 한유(韓鍮)를 체포하여 오니, 임금이 묻기를,
"네가 올린 것은 무슨 상소인가?"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영신(佞臣,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악독한 신하)을 탄핵한 상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그 상소를 읽으라 명하였는데,
첫째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을 팔뚝에 새기고 도끼를 짊어지고서 죽음을 맹세하였음을 말하였으며,
주운(朱雲)[14]
을 끌어대어 자신에게 견주기까지 하였다.이어 홍봉한의 부자 형제가 차례로 과시(科試, 과거시험 합격)를 차지하여 모두 요로(要路, 관직출세의 중요한 길)를 점거하였으며,
권력을 탐하여 마음대로 휘두르므로써 나라를 그르친 죄를 극언(極言)하고, 그 아들 홍낙인(洪樂仁)은 교활하고 광패(狂悖, 사납고 막됨)하며,
그 아우 홍인한(洪麟漢)은 호번(湖藩, 전라도)에서 탐학하여 사람들이 그 고기를 먹으려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망국동(亡國洞)의 망정승(亡政丞)은 이미 동요(童謠)를 이루었습니다."
하였는데, 대개 홍봉한이 안국동(安國洞)에 거주하기 때문이었다.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상소 중에 주운(朱雲)을 일컬은 것은 네가 조선(朝鮮)에서 한 직(直) 자를 얻으려고 이 짓을 한 것인가?"
하니, 한유가 말하기를,
"오로지 나라를 위한 데에서 나왔습니다. 비록 몸이 곧 반쪽이 난다 하더라도 성교(聖敎, 임금의 하교)의 온당(穩當)함을 모르겠습니다."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40년 고심(苦心)에 다만 영부사(홍봉한) 한 사람이 나를 협찬(協贊, 협력하고 찬성함)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마음에 달갑게 앙갚음하려는 것은 곧 당인(黨人)들의 사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 차례 형추(刑推)를 한 뒤에 하교하기를,
"인심과 세도(世道)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작년에 한집(韓鏶)이 있었고, 금년에는 한유가 있다.
그들을 10촌간이라 말하지 말라. 그 마음은 하나 같다. 더구나 신경(申暻)을 처분한 일이 어찌 상신(相臣, 삼정승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아룀으로 말미암았는가? 당인을 유배한 것은 모두 임금으로부터 말미암았는데, 감히 임금에게는 분풀이를 못하고
그때의 보상(輔相, 대신)에게 마음에 달갑도록 앙갚음하려 함은, 곧 길 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하고, 유생의 이름을 유적(儒籍, 유생의 명부)에서 삭제하고 흑산도(黑山島)로 정배(定配)하되 하고,
사흘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押送)하고, 그 상소는 불태우라 명하였다.
-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1770년, 청 건륭(乾隆) 35년) 3월 22일 (기해) 1번째기사
이에 영조는 매우 격노하며 한유를 찢어죽여 시원찮을 판에 죽이라고 명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서남해의 흑산도로 강행군 하듯 사흘 길을 하루 안에 주파하게끔 정말 힘들게 유배보냈다. 북당의 홍봉한은 잠깐 유배를 당했으나 혜경궁의 핑계로 바로 복직이 되었고, 남당의 김귀주는 회심의 일격에 판정패를 당한 셈이 되었다.
한유의 상소가 실패한 직후, 김귀주는 영조 48년(1772년, 임진년) 직접 상소를 올렸다. 요지는 홍봉한이 세손을 이용해 뭔가를 해보려고 한다는 내용이었고, 정황상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추숭을 주장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김귀주의 행보가 세손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영조가 세손에게 그 이야기를 물어보자 세손은 비를 맞으며 대성통곡했다. 이에 영조는 이 상소로 김귀주의 사람됨이 염려된다며 회초리를 등에 지고 석고대죄를 하라는 육단부형(肉袒負荊)까지 내리게 되었다. 김귀주는 아래와 같이 잘못을 영조에게 고하면서 빌어 용서를 받았다.
김귀주의 재소를 읽고 그 사림됨을 염려하다
"실로 어리석고 경솔함을 인연해서 무지하게 망령된 행동이 당습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성교(聖敎, 임금의 하교)로 엄히 묻는 아래에서 변명하겠습니까?"
라고 후회했으나, 임금은 다시 한번 질책했고
(중략)
"차후에 만약 다시 이런 마음이 싹튼다면 장차 임금을 저버리고 선인(先人)을 저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라는 말이 나오고서야 용서했다.
- 《영조실록》 119권, 영조 48년(1772년, 청 건륭(乾隆) 37년) 7월 23일 (병진) 2번째기사
정조 즉위 직후 김귀주는 정2품의 한성부 판윤[15] 이 되었지만, 이 직후 숙적인 홍봉한을 공격하는 회심의 상소를 한번 더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오히려 이전 일을 언급하며 남당의 김귀주를 귀양보냈다. 정조는 바로 이때 김귀주가 세손 시절의 자신이 정순왕후에게 아뢴 내용을 곡해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는 것이다. 어릴 때라 정순왕후하고도 스스럼 없게 얘기 나눈 것을 김귀주가 듣고 상소에 올렸다는 것. 정조의 김귀주 숙청은 상당히 강도가 높았는데, 사사 명령까지 직접 내렸지만 곧 환수되었다."외조부와 사사로이 나눈 대화이며 가정을 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결국 정조는 외조부인 홍봉한의 발언을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않을 경우 추숭을 빌미로 틈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멘트로 이해했고, 이를 다소 경계하면서 정순왕후에게 전달했다. 문제는 이 발언을 김귀주가 직접 문제삼으면서 홍봉한을 죽이기 위해 세손 자신까지 위태롭게 했다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영조 48년(1772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외조부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거기에도 김귀주의 상소에 대해
라고 표현할 정도로 김귀주에게 정말 엄청나게 격노하고 있다. 정조 23년(1799년)경에 외숙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당시 일이 언급되어 있다."흉악하고 반역스러운 심보, 분통이 터져 관이 찢어질 정도"
사실 앞서 보듯이 정조에게 즉위 이전 위협이 되는 세력은 외가인 풍산 홍씨(북당)였지 경주 김씨(남당)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김귀주는 이렇다 할 죄가 없는데 정조가 그를 숙청하는 정황이 엿보인다는 해석도 있다.[16] 즉, 어떻게 보면 정조가 김귀주와 정순왕후를 '배신'한 셈이었다.[17]
이후 정순왕후는 정조의 보호자에서 궐내 견제자, 벽파의 중심점으로 거듭나게 된다.
2.4. 정조 궁정의 궐내 견제자[편집]
정순왕후 김씨가 사도세자 추숭에 부정적이었던 벽파의 중심점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야당' 노릇이라고 보는 것은 애매한 측면이 있다. 정조 시대 벽파는 오히려 정조의 즉위 과정이나 정조의 치세 내내 여당에 가까웠으나, 정조의 탕평 행보에만 거리를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의할 점은 벽파가 사도세자를 싫어한 것까진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도세자의 폐세자가 잘못이니 도로 추숭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이 나오는 순간, 당시 조정을 주도했던 노론계는 잘못하면 왕의 생부를 모함한 역적으로 전락하기에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었다.[18] 애초에 왕의 생부를 모함한 세력이 없었으며,[19]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가 주도했다. 벽파가 사도세자 추숭에 부정적이었던 건 큰 죄를 지어 영조가 직접 처분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는 유명을 조부인 영조로부터 직접 받은 손자 정조가 이를 뒤집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으며, 더 나아가 추숭을 통한 정권 교체를 기도하고 있었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에 대한 경계 때문이었다.
정순왕후의 두드러지는 행보는 바로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이인에 대한 처벌 문제에서 나타난다. 정조가 은언군 이인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려는 시점마다, 정순왕후는 단식 투쟁을 벌이며 이인을 처벌하라고 다그쳤다. 정조 역시 단식으로 맞섰으나 결국 매번 손을 들게 되었다. 하필 은언군인 이유는 바로 그가 숙적인 북당의 홍봉한과 적극 연계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은언군이 역적이라면 풍산 홍씨도 역적과 연대한 존재가 되었으며, 거꾸로 은언군을 사면한다면 풍산 홍씨도 역시 사면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풍산 홍씨가 은언군을 옹립하려는 시도는 분명 사실이었기에,[20] 남인들조차도 대비전의 요청을 거절해야 한다고 외치지 못하고, 대비전의 뜻을 따르라며 외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분명한 명분을 앞세워 정조의 사면, 완화 행보를 압박하는 것이 바로 정순왕후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정조도 보통 머리는 아니어서 수시로 은언군을 불러다 만났는데, 이 과정에서 심환지가
라고 놀랄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정조의 행동으로 인해 민심도 정조에게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정조에게 은언군은 유일한 혈육이자 이복 형제였으며,[21] 그 말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정조를 제외한) 유일한 아들이란 뜻이었다. 따라서 민심은 '주상께서 은언군과 저렇게 우애가 좋으니, 이건 아버지에 대한 효도이기도 하다'란 형태로 바뀌게 된 것. 그리고 민심이 이렇게 바뀌자 정순왕후의 압박도 상대적으로 약해지게 된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효(孝)라는 명분은 너무나 굉장히 강한 명분이었고, 그 명분을 중요시하는 정순왕후로선 더 이상 압박을 강화하기가 곤란해졌기 때문이다."어찌 병가에서 계책을 내어 적을 속이듯 하십니까?"
하지만 동시에 정순왕후는 정조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 직접 약을 들고 방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여 신하들이 말렸는데, 이미 정조의 병환이 회복 불가능한 상황임을 정순왕후 또한 짐작한 듯 하다. 정조 어록집인 《일득록》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외에도 홍인한, 정후겸을 척결하는 명분을 나타낸 책인 《명의록》에서 정조가 남당의 김귀주를 비호했다던지, 내전의 도움이 많았음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둘의 사이는 오히려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조가 의식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정순왕후의 거처인 '수정전(修政殿)'을 언급한 것인데 정황상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급히 정순왕후를 찾으려 했다는 추정이 있다.
2.5. 수렴청정과 재수렴 시도[편집]
정조가 1800년(정조 24년) 음6월 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고 이어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때 국정을 주도하면서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 서약을 받았다. 신유박해를 주도하고, 장용영을 폐지하며 규장각을 축소시켰고, 공노비[22] 를 혁파(革罷)[23] 하였다. 평가는 후술.
3년 동안 수렴청정한 후 순조의 친정이 시작됨을 선포하고 물러났다.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을 거두고 환정하다.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거두고 환정(還政)[24]
하였다.(중략)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차대를 오늘로 앞당겨 정한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경신년의 창황(蒼黃)하고 망극(罔極)한 날을 당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내가 본래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이 없는 데다가 또 여러 해 동안 고질(痼疾)을 앓아 왔으므로, 보통 사람처럼 일을 책임질 수 없었던 것이 오래되었다. 불행하게도 망극한 때를 당하여 부득이 종국(宗國)을 위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담당하여 끌어온 지 3년이 되어 가례(嘉禮)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니, 이 마음의 기쁨이 또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나의 처음 뜻은 새해에 곧 수렴 청정을 거두려 했었는데, 그 사이에 큰 재이(災異, 정조의 승하)를 당하였으니, 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써 마땅히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바로 비상(非常)한 일인데, 이런 비상한 재이가 있게 된 것이다. 해는 주상의 보령(寶齡, 나이)이 오히려 15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새해 초두에 곧 수렴 청정을 거두려 하였다. 새해에는 다시 수렴 청정하지 않으려 한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통유(洞諭, 밝게 타이름)하고 차대를 앞당겨 정한 것이다."
(중략)
하였다.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경사스러운 날이다. 주상의 나이가 곧 15세에 차게 되어 이제 친히 정사를 행하게 되었으니, 경들은 단지 기뻐하여 축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물론 물러나기가 무섭게 훗날 순원왕후가 되는 순조비의 간택을 반대한 권유(權裕, 1745 ~ 1804)를 탄핵하며 벽파에 대한 시파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정순왕후는 당황하여 수렴청정을 그만둔 지 6개월 만에 다시 수렴을 치고 정사에 개입하려 했다.[25]
순조를 시켜서
고 명을 내렸는데, 대신들이 입궐하자 정작 정순왕후는 순조 뒤에 수렴을 치고 앉아 있었고 순조가"할 말이 있으니 대신들 좀 모으라."
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다시 수렴을 재개하겠다는 암묵의 표시였다. 그러자 소론인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1745 ~ 1821)가 갑자기 정순왕후의 지난 4년간의 업적을 칭송하더니"자전께서 할 말씀이 있다고 하신다."
라고 대놓고 수렴을 거둘 것을 적극 청했다. 그러자 벽파의 수장인 우의정 김관주[26] 도 동의했다. 워낙 명분과 상례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던지라 정파가 다르고 아니고를 떠나 사실상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였다. 이에 정순왕후는"그건 그렇고 지금 하는 일이(수렴 재개) 이치에 맞습니까? 할 말이 있으면 성상(聖上)께서 하실 것이니 수렴하지 마시죠."
고 설명했다.[27] 그러자 이시수는 지지 않고 반박하길"내가 수렴 중한 것은 다 알지, 근데 요즘 권유(벽파)를 탄핵하면서 나오는 말을 보니까 누군가가 김조순(시파)의 딸을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그 '누구'가 대체 누구냐? 대간의 상소가 명백하지 않으니 상황이 더 시끄러워지잖아. 그래서 대간에게 그 '누구'가 누군지를 분명히 하게 하고 나온 김에 내 심중에 있는 말도 다 하려고 한다."
라고 아뢰었다.[28] 이에 정순왕후가 슬슬 열받아서"그렇다면 성상께 말씀드려 조용히 하면 되지 왜 수렴 치고 나와서 자전 마마의 공덕에 손상 끼치십니까?"
라고 외쳤다. 이에 이시수가 대답하길"사람들이 뭔 일만 있으면 다 내 탓이라고 씹어대는데 난 공덕이 없는 사람이라서 못 참겠다. 나보고 오늘 스스로의 공덕을 해쳤다고? 분통한 일이 있는데 해명도 못 한단 말이냐?"
라고 했고, 이에 김관주가 이시수의 말이 맞다고 거들었다.[29] 정순왕후는"그럼 성상께 말씀드려 처분하면 되지 왜 수렴을 치고 엄한 하교를 내리시나요?"
라고 과거의 일을 상기하자 이시수는"내가 수렴 거두면서 큰 형정에는 참여한댔지?"
라고 했고 정순왕후는 정말로 열받아서"물론이죠. 작은 일에도 얼마든지 참여하시지요. 그런데 수렴은 거두고 전하를 통해서 참여하세요. 그럼 자전 마마의 공덕이 빛날 것입니다."
라고 일갈했다. 그러자 이시수가 눈물을 흘리면서"내가 공덕이 어디 있소? 지금 공덕이란 거짓말로 날 속이는구나!"
라고 아뢰었다.[30] 그러자 정순왕후는"제가 거짓말을 했다고요? 신하 된 몸으로 그런 죄를 짓다니 마땅히 죗값을 받겠습니다."
라고 좀 누그러진 투로 말하자 이시수는 통곡하면서"내가 무식해서 오늘 좀 추태를 부렸다. 그런데 나도 말 좀 하고 살자. 왜 그것도 못 하게 만드냐?"
라고 했고 김관주가"이런 말까지 들었으니 신은 즉시 죽어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라고 정순왕후를 탓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정순왕후가 백기를 들고"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라고 하며 수렴을 거두고 물러났다."내가 견식이 없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죄 삼지는 말아 주시오. 앞으로 일이 있으면 언교를 내리겠습니다."
이전까지는 명분을 쥐고 행동했기에 각종 정치적 사안에서 벽파적 입장을 내세우는 데에 거칠 것이 없었던 정순왕후가 명분 없는 재수렴 시도를 자행함으로써 반대파의 반격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원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31]
실록의 관련 기사를 정독해 보면, 정순왕후는 재수렴 문제를 가볍게 퉁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 하지만 이시수는 '재수렴은 부당하다'는 주제에서 물러서지 않고 원칙론과 명분론을 주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소론계 이시수의, 나아가 시파의 기선 제압으로 이어진다.[32]
다음날 정순왕후는 자신이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다는 것이 모함이라는 걸 해명하는 편지를 내렸고 심부전으로 불과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33]
2.6. 정순왕후의 승하와 사후 - 병인갱화, 벽파의 몰락[편집]
정순왕후는 1805년(순조 5년) 음력 1월 12일, 창덕궁 경복전에서 승하하였다.
오시에 대왕 대비가 경복전에서 승하하다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대왕 대비가
그러나 정순왕후의 승하와는 별개로 승하(1805년) 직후 벽파는 2년만에 순식간에 몰락했다. 따라서 벽파의 집권기는 정순왕후의 수렴기와 거의 겹친다고 봐도 무방하다.
권유의 상소로 비롯된 대혼 저지 기도 사건으로 권유, 이안묵, 정재민이 물고(=고문 치사 또는 유배지에서 사망)된 것이 시작이었다. 벽파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은 바로 직후의 김달순의 상소였다. 박시백은 이를 "자살골"이라고 언급했을 정도.
다급해진 벽파의 맹장 김달순은 사도세자 추숭 찬성 세력을 비판하며, 《영남 만인소 사건》의 소두인 이우를 처벌하고, 사도세자를 비판했던 박치만, 윤재겸을 추증하며 시호도 내려주어 사실상 벽파의 무장을 못박자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조득영이
라고 상소해 벽파 축출의 시동을 걸었다[34] . 순조는 조득영의 상소에 점차 수위를 높이며, 김달순, 김관주를 죽이고 권유의 상소에 찬동하는 기미를 보였다는 이유로 심환지를 추탈했으며, 김달순을 옹호한 서매수를 삭탈시켰다."김달순은 정승이 되어서야 의리를 알았단 말입니까?"
이후 벌어진 김이영의 《8자 흉언 상소》는 벽파를 역적으로 못박아 버렸다. 이미 영조 년간에 김한록이
며 정조를 모해하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병인갱화 참조.) 이로써 김귀주, 김종수가 추탈되었다[35]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逆敵之子 不爲君王)"
그리고 벽파가 소멸한 자리는 당색이 거의 없었던 시파가 채웠고, 곧 세도 정치의 수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정순왕후 역시 김조순을 특별히 견제하려고 했다는 징후는 없다.[36]
3. 가계[편집]
3.1. 친가(경주 김씨)[편집]
- 조부 : 호조참의 증 영의정(戶曹參議 贈 領議政) 김선경(金選慶)
- 조모 : 증 정경부인 홍씨(贈 貞敬夫人 洪氏)
- 아버지 : 영돈녕부사 오흥부원군 증 영의정 충헌공(領敦寧府事 鰲興府院君 贈 領議政 忠憲公) 김한구(金漢耉)
- 어머니 : 원풍부부인 원씨(原豊府夫人 元氏)
3.2. 외가(원주 원씨)[편집]
- 외조부 : 진천현감 증 판서(鎭川縣監 贈 判書) 원명직(元命稷)
- 외조모 : 증 정경부인 심씨(贈 貞敬夫人 沈氏)
3.3. 시가(전주 이씨)[편집]
3.3.1. 배우자 / 자녀[편집]
- 남편 : 영조(英祖) 이금(李昑)
- 자녀 : (슬하에 자식 없음)
- 의붓아들 : (추존)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 이선(李愃)
- 의붓며느리 : (추존)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4. 평가[편집]
오랫동안 대중의 인식 속에는 정조가 세운 업적을 몽땅 뒤집어 엎어 버리고, 조선 왕조를 망친 벽파의 우두머리라는 부정적 평가가 높았다. 이인화는 소설 《영원한 제국》에서 "임진왜란보다 더한 존재"였다고 혹평하기도 했으며, 맹꽁이 서당의 작가 윤승운 작가는 악마급의 인물로 묘사를 해놨다.[38]
그러나 근래에 들어선 오히려 그 반작용으로 정순왕후의 높은 정치력과 업적들이 재부상하고 있다.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외로 당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여걸로 매우 고평가되는 인물이며, 박시백 개인도 정순왕후에 대해 상당히 호감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실록으로 실제 행적을 살피면 정순왕후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부당한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정계에서 남인을 사실상 추방하는 신유박해를 일으킨 것도 일부 참작의 여지는 있다. 사실 신유박해 초기는 남인 및 시파 계열에 대한 정치적 공세에 가까웠기 때문에 적당히 끝날 수 있었던 요소가 많았으나,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적당히 수습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오히려 정순왕후는 신유박해를 주도하기는 했으나 사태가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제어하고 있었다. 한 예로 수렴청정할 때 정약용 등 남인을 국문하고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요구를 여러 번 묵살한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의 목이 떨어진 신유박해 때 정약용 등 남인 핵심 인물들이 살아남은 것도 정순왕후의 덕이 크다.
백성들의 민생에 신경을 써 비변사, 관찰사, 수령 등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고, 공노비를 혁파하기도 했다. 특히 공노비 혁파와 장용영 폐지 등은 선왕 정조의 뜻을 계승했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정책이었다[39] . 정치적으로 이전 정권과 대립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현 정권이 그 때 시작한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경우는 꽤 여럿이기 때문에 이것만 봐서는 정순왕후가 反정조파라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기 어렵다.[40]
규장각 축소도 마찬가지로, 정조 말기의 규장각은 이미 과거 세종 시기의 집현전 수준을 넘어서 승정원과 6조의 업무까지 관여하는 등 그 권한이 비대해져서 축소가 불가피했다. 장용영이나 규장각의 부작용은 남인인 정약용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정순왕후가 '여군'(女君), '여주'(女主)로 칭했다는 것을 두고 스스로 여인 군주를 자처했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사실 이런 표현은 동양의 왕후들이 사용하던 용어로 수렴청정을 했던 조선의 다른 대비들도 다 사용한 용어였다.
정순왕후는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임명했으나, 벽파 일변도의 정치만을 편 것도 아니었다. 소론 계열인 이시수, 이병모 등의 대신들은 신유박해에서도 무사했고 영의정, 병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특히 시파의 김조순을 차기 국구로서 적극 우대했다.
오히려 이 맥락에서, 정순왕후가 김조순을 숙청하지 않아 세도 정치를 불러왔다라는 이상한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이는 정조의 결정을 뒤집지 않은 것일 뿐 실책이라 보긴 애매하다. 김조순은 노론의 핵심 가문이었으며, 계속 조용하게 처신하고 다녀서 조정의 경계를 별로 안 받았고 이러니 정순왕후가 김조순을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자세한 것은 김조순 문서 참조. 장용영 폐지건과 관련해 보면 묘한 것이, 아직 국구도 되지 않은 김조순을 불러다 장용영 대장에 앉힌 사람이 정순왕후였다. 정순왕후가 김조순과 장용영을 자신의 반대 세력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세도 정치가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기존의 붕당 정치 체제를 뿌리부터 파괴한 영조와 정조의 책임이 훨씬 크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즉, 세도 정치의 책임을 단순히 정순왕후에게만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거슬러간다면 숙종이 환국을 남용하며 조선 붕당의 건전성을 통째로 날려버렸고, 영조가 풍산 홍씨를 의도적으로 양성함으로써 세도 정치의 씨앗을 뿌렸으며, 정조는 기껏 척신을 청산하고 제대로 된 붕당을 복구했으나 이미 격화된 당쟁은 상대당의 존립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일당독재화의 풍토로 이어졌다. 결국 정조 개인에 절대적으로 균형이 맡겨진 준론 탕평은 정조 말년으로 갈수록 균열을 드러냈으며, 정조는 말년에 건강이 매우 약화되고 훗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 벽파가 드세면서 자신이 내세운 탕평이 무너질까봐 결국 아예 자신의 철학을 부정해버리고 김조순을 위시로 한 안동 김씨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도 정치의 포문을 직접 열어 버렸다. 그리고 전술하였듯이 정순왕후는 정조의 뜻을 존중하여 자신의 정치 성향인 벽파와 대립하는 시파인 김조순을 국구(= 왕의 장인어른)로 삼았다.
결국 정순왕후가 정조의 정책을 부정해서 조선의 몰락이 왔다던 과거 대중적 인식은 완벽한 거짓, 그리고 정순왕후가 정조의 정책을 따랐으니 세도 정치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다.
다만, 정조조 대까지 있었던 남인-시파 계열을 꽤 날려버린 것도 정순왕후의 책임이 맞긴 하다. 정순왕후의 정치기조는 정조의 기조+ 본인 입맛 추가(당파색)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실제로 정순왕후 대까지는 요직에 등용되었던 인물을 보면 남인을 날려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온건한 소론-시파 계열들이 그대로 등용되어있긴 했었다. 최소한의 다양성은 안 잃었다는 얘기. 정말 문제가 터진 것은 정순왕후가 물러나면서부터다. 이렇게 최소한으로 유지되던 균형을 안동 김씨 세력이 정순왕후가 물러나자마자 정순왕후 중심으로 한 벽파 세력을 치면서 무너졌고, 순조는 나이가 어려 정치를 모른다는 핑계로 이를 방치했고 이를 조율해줄 세력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41] 정순왕후 대에 벌어졌던 본인 당파색 추가의 부분이 정조 시대 때까지만 해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당파간 균형을 깨가는 과정 중에 하나이긴 했으므로 그에 대한 비판은 피해가기 힘들다. 하지만 조선을 망친 세도정치의 근본적인 원흉은 죽기 전 미봉책으로 외척인 안동 김씨를 끌어들여 불균형의 단초를 제공한 정조와 20년 넘게 재위에 올라있으면서 최소한의 균형잡기도 안한 순조라고 할 수 있는데, 겨우 3년 간의 수렴청정을 했을 뿐이며 재수렴을 하려고 해도 신하들의 거센 반발을 살 만큼 경직된 유교 사회에서 살았던 정순왕후에게 저 둘보다 세도정치의 책임을 더 진다는 것은 확실히 비이성적이고 과도한 책임묻기이다.
아니, 더 나아가 역사의 만약이란 없지만 정순왕후가 정조와 동시에 죽었다면 세도정치가 더 빨리 왔을 수도 있다.[42] 세도정치의 시대가 열린건 정순왕후 중심의 벽파가 무너지고 정조가 등용했던 안동 김씨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면서이니 정순왕후가 없었으면 오히려 그 과정이 앞당겨졌을 수도 있다. 결국 이미 토양이 다 형성된 시기에 수렴청정을 한 것때문에 한 것 이상으로 욕을 먹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애초에 영/정조가 유지했던 정치적 균형은 시스템 자체로 돌아갈 수 있는 균형이 아니라 그것을 조율해나갈 수 있는 군주 개인의 유능함이 전제된 균형이었다.[43]
피로 피를 씻는 붕당의 대결은 한참 이전인 선조 시기 정여립의 난부터 씨가 보였다. 여기서 원한을 가진 대북은 광해군시기 봉산옥사와 계축옥사에 앞장서 다른 붕당을 박살내고 다녔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이 정권을 잡아 대북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광해군 시기에 다들 질려버렸는지, 인조반정 때 대북을 완전히 소멸시킨 후에는 붕당 정치는 최대한 유혈사태를 피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얼마든지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던 예송논쟁이 상당히 평화롭게 끝난 것만 보아도 이런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선조가 왕권 강화 목적으로 지른 피튀기는 붕당 대립이 인조 이후에는 그럭저럭 진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숙종은 환국을 일삼으며 또 붕당 정치에 유혈사태가 마구잡이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최소한 붕당의 몰락과 세도정치의 등장이라는 부분에서는 정순왕후보다는 숙종이 더 비판을 받아야 하고, 재위 기간이 엄청나게 길어 붕당 정치 폐단을 교정할 기회가 많았던 영조가 제일 크게 비판을 받아야 한다.
정순왕후 대에는 하나의 외척이 독점적으로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균형이 유지됐던 것을 보면, 최소한의 중도는 지키면서 균형적인 정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정순왕후가 정말로 형성된 대중적 이미지대로의 정치를 했다면, 안동 김씨가 아닌 경주 김씨가 조정을 다 장악하고[44] 벽파 일변도로만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인사이동을 보면 순조와 헌종 때에 비하면 훨씬 균형적이며 오히려 정조 대의 인사에 가깝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아버지인 정조에게 물려받은 왕권이 약하지도 않았고 그 왕권을 보존하기 위해, 왕실 어른이 이토록 균형을 맞춰주었는데도 왕으로서 조정이 그대로 세도정치로 직행할 때까지 수십년간을 손 놓고 있었던 순조였다. 사실 신유박해가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세도정치 때랑 비교해보면 정순왕후 때까지는 인물 등용이 선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정순왕후는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수렴 너머에서도 왕권을 탄탄하게 유지하며 혈연상 증손자이자 실제로 정치를 주도해야 할 왕인 순조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 공로를 세웠다. 이런 정순왕후의 노력에도 세도정치의 발발을 그대로 방치한 순조야말로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다.
한마디로 정순왕후와 정조의 관계, 그리고 종합적인 세도정치로의 진행은
1. 정순왕후는 정조와 세손 시절에는 협력관계였으며 재위 시절에는 당파적으로 대립한 부분이 있었으나, 그래도 전체적으로 사이가 크게 나쁘지는 않았고 정조 역시 정순왕후를 왕실 어른으로 대우했다. 정조 사후에도 정조가 키워온 남인을 숙청하기도 했으나 그들을 유배보낼 뿐 무자비하게 처형하지 않았고, 정조가 주요하게 등용한 김조순을 비롯한 시파계열의 인사나 유지를 이어간 부분도 많으며 이를 계속 천명하기도 했다. 특히 정조와의 사적인 관계는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괜찮았던 것으로 추정된다.[45] 또한 3년의 수렴청정 동안 정조의 유지를 가급적 순조의 친정 전까지, 그대로 이양해 주기 위해 발휘한 정순왕후의 정치력이 돋보인다.
2. 세도정치의 토양은 권력을 지나치게 군주 개인의 능력에 좌지우지되도록 시스템을 짜고, 외척을 입맛대로 써먹으며 정치를 했었던 숙종-영조-정조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강화되며 형성되었다.
3. 군주 개인의 유능함을 전제로 돌아가던 시스템은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군주가 권좌에 올라 세월을 보내면서 무력화되었고, 이로 인해 정조와 정순왕후가 열심히 맞추었던 조정 내 세력 간의 균형 또한 무너지면서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선왕들이 입맛대로 키워놓은 외척 세력이 무력한 왕을 만나 마침내 전체 시스템을 장악하면서 세도정치가 완전히 자리잡았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5. 여담[편집]
- 정순왕후 시대에 가장 부정적으로 거론되는 사건은 혹관 이여절의 처리에 있었다. 이여절은 일종의 법비에 가까운 인물로 정조 시절 가혹한 혹정으로 인해 장살자를 25명이나 만들었지만 공적인 처벌이었다는 이유로 귀양에 그친 인물이었다. 이여절은 이후 복직되었으나 그 행태가 변하지 않았는데 신유박해 와중에 함경남도 장진부사로 있으면서 황씨 성을 가진 천주교인을 물고하여 황사영이라고 거짓자백하게 만든 다음 거짓으로 "황사영을 잡았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진짜 황사영은 충청북도 제천에서 잡혔으며, 조정은 함경감사를 보내 이여절의 악질적인 행보를 파악하고야 만다. 이여절은 공무상 과실치사죄, 허위보고죄, 기군망상죄 등 중죄를 1번이 아니라 2번이나 저지른 재범으로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사형감이었다. 정순왕후마저 격노하여 "참으로 기가 막힌다"며 이여절을 사형시키려고 했으나, 심환지가 "공무상 죄니 사형은 곤란하다"며 반대하였다. 심환지가 정조 년간에 이여절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때는 사형을 주장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신유박해 와중이라는 시점이 고려되었을 수도 있다. 정순왕후는 "이 이여절이라는 자는 무도한 탐관오리로 팽아(삶아 죽이는 형벌)의 죄도 부족한데, 무고하고 가엾은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며 "영상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평생 충군하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에는 이여절이 평소에는 일처리도 시원시원하고 공정하고 유능하다는 평판의 문제도 있었다. 단순한 탐관오리가 아닌 지능형 강약약강에 지방관의 사법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물고를 내 실적을 올리는 스타일의 미꾸라지 법비였던 이여절은 결국 이번에도 살아남아 절도에 충군 후에도 큰 공을 세워 복직되었고, 전라북도 전주부윤을 거쳐 순조 10년에는 전라좌수사까지 되었다. 정조 역시 이여절을 살려주었다는 점을 보면, 정순왕후의 판결은 아쉽기는 하지만 수령에게 사법권을 주는 왕조 자체의 맹점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 야사에는 간택 당시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규수들이 모두 장미, 모란 같은 꽃을 언급할 때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꽃이 가장 좋다"고 대답했고,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보릿고개라고 답해 정순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금이라고 대답하고 "가장 깊은 것은 바다, 강, 뒷동네 연못 등이 아닌 사람의 마음"이라고 대답하는 2가지 질답이 추가되기도 한다. 또한 간택 후보들이 앉을 방석에 후보들 아버지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정순왕후는 여기에 앉지 않았다고 한다. 임금이 이유를 묻자 "어찌 딸 된 자가 제 아비의 이름을 깔고 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야사와 이날 마침 비가 내리자 "궁궐의 행랑 수가 얼마인지를 알아보라"는 질문을 하자 다른 규수들은 모두들 당황하면서 궁궐 지붕을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홀로 머리를 내리고 침묵하자 영조가 "어찌하여 머리를 내리고 있느냐"고 묻자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면 행랑의 수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 정순왕후가 태어날 당시의 이야기에는 부친인 김한구가 아내를 가마에 태우고 친정으로 가고 있었는데, 눈으로 덮힌 벌판 한가운데서 아내가 출산하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이사관이라는 선비가 자신이 입고 있던 털옷을 부인에게 내어주고 김한구와 같이 가마를 끌고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서 손수 쌀과 미역을 사주며 해산 구완을 해 주었다. 이 때 태어난 정순왕후는 왕비로 등극한 뒤에 영조에게 얘기해주었고, 영조는 이사관을 승진시켜 정승 자리에 앉혔다.[46]
- 입궐 초기에는 궁녀들이 뒷면의 옷 치수를 재려고 무심코 "돌아서 주시옵소서"라고 했더니 "네가 돌아가면 될 것을 감히 누구보고 뒤돌라 하느냐"하며 호통을 쳐 궁인들이 벌벌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 정순왕후는 영조의 계비로 입궁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인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오늘날의 중학교 2학년인 15세(만 13~14세)였다.[47]
6. 대중매체에서[편집]
사극에서는 정순왕후의 정파가 노론 벽파라는 것 때문에 개혁 군주 정조의 치세를 방해하려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최근 들어서 노론 음모론에서 탈피한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정순왕후 역시 중립 내지는 조력자나 왕실 어른 정도로 나오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6.1. 영화[편집]
- 1777년(정조 1), 30대 초의 정순왕후를 표현했다. 배우 한지민은 이산(드라마)에서는 정조의 연인 의빈 성씨 역을 맡았는데 본작에서는 정반대로 정조의 적으로 설정된 정순왕후를 연기한다. 정조를 도발하고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의 싸대기를 날리는 사악한 요녀로 그려진다.
임오화변을 다룬 영화 사도에서는 서예지가 정순왕후를 연기했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과는 달리 노론 음모론에서 탈피했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중립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사도세자와는 서로 무관심한 사이지만 공통점으로 영조를 정말 무서워한다는것이다. 참고로 영조 앞에서 영빈(전혜진) 말에 대꾸했다가 인원왕후(김해숙)에게 버릇없다고 회초리 맞는 여인은 나인 문소원으로 박소담이 연기했다.
6.2. 드라마[편집]
- 영조 말~정조 초의 정순왕후를 표독스럽게 연기하였다.
- 정조 말~순조 초의 정순왕후를 연기하였다. 사극 베테랑답게 수렴청정하는 정순왕후의 위엄을 잘 살린 것으로 평가된다.
-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 영조와 막 혼인한 10대의 정순왕후. 방영당시 19세였던 이인혜가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굉장히 표독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진다. 중전이 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사도세자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직감하고, 혜경궁 홍씨를 사소한 일로 트집잡아 종아리를 때린다. 물론 전적으로 드라마의 창작이고 사료에는 비슷한 사실조차 서술된 적이 없다.[48] 그래도 막판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서 죽이려고 할 때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부친 김한구에게 더 심각해지기 전에 빨리 말려야하는거 아니냐고 반응하기도 한다. 표독스러운 면모가 있기는 해도 이후 노론 음모론을 차용해서 묘사된 사극 속 정순왕후에 비해서는 막나가는 인물은 아니다.[49]
- 작중 영조 말 ~ 정조 대에 걸쳐 권력의 중심에 선 20대 ~ 40대의 정순왕후를 표현했다.[51] 여기서 언급된 작품들 중 가장 왜곡이 심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심지어 야인시대의 이정재를 흉내낸듯한 조직 회합까지 만들어 어이를 상실하게 하기도 했다.[52] 그동안 대중들로 하여금 정순왕후는 정조의 개혁을 망친 악녀라는 인식을 갖게 된 계기가 된 배역이기도 했다.
- 여기서는 철저하게 정조의 적으로 나온다.
6.3. 만화[편집]
7. 참고 문서[편집]
- 김관주
- 김귀주
- 김조순
- 김종수
- 노론 음모론
- 동구릉
- 병인갱화
- 사도세자
- 세도정치
- 수렴청정
- 수빈 박씨
- 숙의 문씨
- 순원왕후
- 순조
- 순조실록
- 승정원일기
- 신유박해
- 심환지
- 영남 만인소 사건
- 영빈 이씨
- 영조
- 영조실록
- 은언군
- 인원왕후
- 임오화변
- 일득록
- 일성록
- 정성왕후
- 정약용
- 정조
- 정조실록
- 정후겸
- 조선/왕사
- 조선왕조실록
- 창경궁
- 창경궁 명정전
- 창경궁 영춘헌
- 창덕궁
- 창덕궁 경복전
- 창덕궁 수정전
- 한중록
- 홍봉한
- 홍인한
- 화완옹주
- 화평옹주
- 황사영
- 효안전일기
- 효의왕후